INTERVIEW


박서보

아흔, 가장 행복한 시절


STYLE H magazine 

Issue No. 205

2022 February


인터뷰  

임나리 


진행 

아키킴


사진 

이경옥





박서보 (1931~)
한국을 대표하는 단색화의 거장이자 교육가. 경상북도 예천 출생으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장,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1994년 서보미술문화재단을, 2019년에는 기지재단을 설립했다.

박서보의 인스타그램 최근 소식을 본다. 아내와 함께 옥주현이 덴버 부인 역을 맡은 뮤지컬 <레베카>를 보고 왔다고. 자랑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데, 경북도시자의 경북 부심에는 지고 말았다고. 리처드 로저스의 부고에 심심한 조의를 표한다고. 다양한 사람을 경계없이 만나고, 이야기 나누고, 슬퍼하고 웃으며, 생을 충실하게 감각하고 있는 그는 올해 아흔둘. 정초에 연희동에서 만난 그는“젊은 시절보다 요즘 사진이 순하게 나와서 더 좋아”라며 멋지게 포즈를 취했다. 주변을 제압하던 눈빛, 거침없는 행보와 언어로 카리스마 넘쳤던 그는 나이 드는 것 별거 아니라며, 사람이 순해지는 거라고, 지금 가장 행복한다고 말한다. 단색화의 거장이자 한국 화단의 대가인 그의 날 선 마음이 이렇게 온순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묘법을 긋고 그었던가. 척박한 이 땅에서 나고 자라 예술가로, 아버지로, 사람으로 뿌리내린 것이 못내 자랑스러운 박서보. 지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90대를 보내고 있다. 




오늘도 근사한 자수정 반지와 목걸이를 하셨어요. 
그림을 그리다 보면 손톱에 오일이나 물감 같은 게 자꾸 껴요. 화가 태를 내고 싶지 않아서 베레모라는 것도 써본 적이 없는데, 손톱도 늘 바짝 깎죠. 그런데 지금 내 손은 완전 노인 손이란 말이죠. 그래서 자수정 반지와 목걸이 같은 걸 하는 거예요. 시선이 그리 가도록. 사람들이 반지에 눈길 주다 보면 내 손의 주름은 잊혀지는 거죠. 

입으신 재킷도 너무 근사해요. 소문난 멋쟁이시잖아요. 
이 재킷은 로로피아나 거예요. 몇 년 전 파리 갔을 때 샀어요. 한번 만져봐요. 얼마나 부드러운지. (슬쩍 가격을 이야기한다.)

부침 많고 안정적이지도 않은 작가라는 길을 가시게 된 계기가 있나요?  
어린시절에 아버지는 나보고 논리적이고 말도 잘 한다고 법대 가라고 했어요. 점쟁이가 셋째 아들이 세계적인 인물이 된다고 하니까 나를 더 법률 공부 시키려고 했는데, 나는 노는 게 좋았어.(웃음) 경기중학교 시험을 봐야 하는데 내가 연날리기에 미쳐서 매일 같이 공부하러 간다 하고 연하고 노는 거죠. 연에 푹 빠져 시험에는 떨어졌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아요. 고등학교 가서도 아버지와 신경전을 벌이다가 대학 1차 지원 시기를 놓쳤어요. 내가 살던 안성에 이당 김은호 선생이 내려와 계셨는데 그분이 그린 미인도를 단번에 내가 똑같이 그린 걸 보고 사람들이 무조건 미술대학 가야 한다고 했죠. 당시에는 미대 간다고 하면 환쟁이라고 해서 인식이 안 좋았거든. 홍대에 청전 이상범, 고암 이응노 화백 같은 기라성 같은 교수진이 있다는 기사를 보고 동양화과에 지원했어요. 근데 대학에서 첫 학기를 시작하고 얼마 있지 않아서 6.25전쟁이 났어요.

메타버스, NFT 같은 것이 화두인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실존 자체가 위협받는 전쟁이라는 상황이 가늠되지 않아요. 
선생님에게 전쟁은 어떻게 남아 있나요? 
대학 다니면서 회현동에 있는 이모부 집에서 하숙했는데, 아침에 이모부가 나를 막 깨우더니 북이 쳐들어왔다고 빨리 부모님 댁인 안성으로 가라는 거예요. 사방에 시체가 있고, 트럭과 집에서는 불이 나고… 며칠 만에 어렵사리 안성 집에 왔더니 가족들은 내가 다 죽은 줄 알았대요. 원래 내가 눈물이 많아. 한번은 아버지가 나 훈련시킨다고 닭 목을 비틀더니 밟아서 마저 죽이라는 거야. 내 발 아래에서 닭이 버둥거리잖아요. 불쌍해서 발을 떼었더니 닭이 그대로 도망갔어요. 그런 사람이었는데, 전쟁을 겪은 다음에는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며서 나름의 살아가는 요령을 터득하게 된 거 같아요.  

전쟁 이후에 한국 화단에서는 다양한 미술 단체가 앞다투어 생겼어요. 
선생님 역시 1957년20대 신인 작가들과 함께 저항정신이 빛나는 현대미술가협회(이하 현대미협)를 만들었죠. 
김창렬, 하인두 같은 친구들과 함께 만들었어요. 모진 소리 안 하는 김창렬이 리더일 때는 창립전에 젊은 작가들 소품이 걸려 있는 거예요. 제2회 전시 때 나를 찾아왔길래 나는 ‘반국전’* 이라는 생각에 맞춰 통일된 이념으로 우리 젊은 작가들이 뭉쳐야 한다고 주장했죠. 작은 작품 필요 없다, 덕수궁미술관에 대작을 걸어야 한다고 말이죠. 당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덧칠한 그림을 그렸는데, 방근택 평론가가 앵포르멜 Informal이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내가 한국 최초의 앵포르멜 작가가 됐어요. 1960년에 열린 제6회 현대미협 전시에서는 서브 타이틀로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건립 기금 모금전’을 붙이자고 제안했어요. 베니스 비엔날레에 한국도 참가해야 한다고 홍보하면서 우리 전시의 가치도 높이고, 그런 전략으로 짠 거에요. 젊은 작가들이 어떤 목적을 위해 함께하면 더 울림이 생기잖아요. 

*반국전 선언: 박서보는 1956년 명동 동방 문화 센터에서 김영환, 김충선, 문우식 등 홍대 출신 작가 3명과 함께 그룹전 <4인전>을 열었다. 이 전시를 기획하며 박서보는 전시장 입구에 ‘반국전 선언’을 써서 붙였다. ‘반국전 선언’은 당시의 작가들이 화단에 데뷔하거나 작품을 발표하는 권위 있는 채널이었던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줄여서 ‘국전’이라고 부름)에 대해 반대와 저항을 공식적으로 표명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출처: <박서보, 단색화에 담긴 삶과 예술>, 케이트 림 지음, 마로니에북스


재료도 변변찮은 시기에 작가로서 어떻게 활동을 이어 가셨나요?
작가는 철저한 물량이 있어야 해요. 나는 일평생을 하루에 14시간씩 밤낮으로 그렸어요. 피난 다니던 시절에는 부산에서 캔버스 살 돈이 없어 차고 있던 시계를 국제시장에서 팔아가지고 가판대에서 재료를 구해서 그렸죠. 송도에 있는 산꼭대기에는 북한 비행기가 오면 쏘는 대공포 부대가 있었는데, 그 골짜기가 전쟁 때 비상식량을 담은 레이션박스(Ration Box) 버리는 곳이었어요. 나는 가위 가지고 다니면서 레이션박스 모양 그대로 잘랐죠. 시멘트 포대가 상당히 질긴데, 거기에 콜다르를 발라서 종이를 배접한 게 레이션박스였어요. 그게 물에 빠져도 해체되지도 않고 튼튼해요. 그걸 잘라서 잔뜩 쌓아놓고 저녁에 유화로 자화상을 그렸어요. 근데 김환기 교수님이 “자네 서양화 해본 거 처음 맞나? 이 자식 천재네”라고 하셨죠. 그렇게 서양화과로 전과했어요. 어떤 상황에서든 그림을 그리려는 내 의지를 꺾을 수 없었어요.

1961년에는 세계청년화가 파리 대회에 한국 대표로 지명돼 어렵사리 후원금을 받아 다녀오셨어요. 
그때 ‘한국의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패기로 머리도 삭발해 ‘박 브리너’로 불리셨다고요. 서른 살에 만난 서구 세계는 어떠셨나요? 
프랑스에 가보니 여기는 이미 끝났다는 인상이 들더라고. 기에는 두 가지가 있어야 해요. 하나는 테크닉의 기, 또 하나는 정신의 기. 그 두 가지가 다 필요한데, 테크닉이 정신을 추월해서 넘어가면 안 된다는 거죠. 정신의 기를 기술이 방법적으로 뒷받침해줘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프랑스 미술계는 이미 모두 손장난이었어요. 테크닉으로 장난만 치는 거죠. 그걸 보자마자 일주일 만에 프랑스는 끝났다고 판단을 내렸죠. 그래도 열심히 해서 파리청년대회에서 ‘원죄’라는 작품으로 1등을 하고, 다른 작업으로 3등을 했지.(웃음) 근데 동시 수상이 안 되어 3등은 포기했어요. 

이후 파리 비엔날레까지 한국 작가를 알리려고 열심히 뛰어 다니셨잖아요. 
1961년 제2회 파리 비엔날레가 열렸는데, 어떻게든 한국 작가들도 참여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변종하 작가가 ‘무슈 박 쓸데없는 짓 하지 맙시다’라고 했는데, 대사관과 유학생회 등을 열심히 들쑤시고 다니면서 ‘우리 미술사에 훗날 남을 것이오’라고 했지. 교섭을 해야 결과가 되는 거죠. 그렇게 어렵사리 한국이 파리 비엔날레 초청을 받았어요. 근데 한국에서 온 참가 신청 서류를 보니 김창열, 정창섭, 조용익, 장성순 이렇게 네 작가뿐이고, 나는 명단에 없었어요. 엄청 쇼크를 받았죠. 나는 이미 파리 세계청년대회에서 상을 탔으니,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명분이었죠. 속에서 피눈물이 나지만 나는 대의가 중요하거든. 사실 살다 보면 돈, 명예, 사람, 셋 중에 사람이 남아야 해요. 돈이나 명예는 따라올 수 있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거든. 평생 투쟁하면서 겁없이 살다 보니 돈이나 명예가 그냥 따라왔지. 

70년 넘게 그림만 그려 왔어요. 작가로서 슬럼프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내가 평생 부족한 것도 많고, 넘치는 것도 많았어. 내 성질이 지랄망퉁이야. 그러다 사람은 어떤 계기로 깨닫는다고. 어려움에 부딪히다 보니 나 혼자 집에 앉아서 동양에 대해 알기 위해 노자며 장자며 읽고 또 읽었어요. 이거 아니구나, 나는 서양 놈들 이론에 의한 화가였지, 기실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죠. 내가 책을 읽으면서 깨달은 것은 나를 비워내야 한다, 선비처럼 살자. 옛날 선비들이 사랑방에 앉아서 지필묵 가지고 헛기침하면서 사군자 치고 그런 것이 아니라 정쟁으로 피폐해진 나를 다스리기 위해 글씨를 쓰고 난을 친 거거든. 예술가가 되기 위해 반복적인 일을 하다 보면 더럽혀진 자기가 맑게 걸러져요. 그런 세계관으로 나를 비워내야 한다는 걸 알았죠. 

1960년대부터 연필 묘법을 시작했습니다. 묘법에 대한 아이디어는 어떻게 얻었나요?
우리 둘째 아들이 첫째 아들과 5살 차이가 나요. 형은 학교 가는 8살이 되었는데, 형 없을 때 의자에 올라가 테이블에 앉더니 공책을 펼치고 그 한 칸 속에 고사리 손으로 글자를 쓰는데 네모 칸에서 자꾸 벗어나는 거예요.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쓰고 지우고 다시 쓰고… 그냥 이러니까 종이가 구겨지고 몇 번 막하다 보니 찢어지고 그러거든. 그 다음에 ‘에에에에’짜증을 내면서 연필로 이렇게 그어대는 거야. 포기하고 체념을 한 거지. 아, 그게 바로 내가 찾던 거였어요. 그래서 아들 흉내를 내기 시작했지. 캔버스에 희끄무레한 칠을 한 다음 자를 대고 방안지처럼 칸을 만들고 그 위에 연필로 에이 하면서 빗금을 그었다고. 내가 하면서도 이것이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 모르겠어. 그러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역시 이게 옳다 그러면서 과거의 ‘유전질’ 작업을 끝내고, 200호나 500호에 그림을 그리는데 남에게 안 보이려고 늘 작업실 문을 걸어 잠그고 했어요. 친구이자 작가 이우환이 한국 오면 늘 우리 집에서 며칠 묵었는데, 한번은 배탈이 나서 작업실 밖에 있던 화장실 잠깐 다녀온 사이에 그날 따라 집에 일찍 왔다가 내 그림을 본 거예요. 너무 좋다면서 무조건 계속하라고 하더라고요.  

처음 묘법은 연필로 시작했어요. 연필로 거대한 평면을 채워나가는 작업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아요. 
1975년에 이우환 작가가 일본 동경화랑에서 전시 하자고 했어요. 그게 바로『다섯 가지 흰색』전시 였어요. 그때 일본 갔다가 화방에 갔는데, 나는 여태 4B 연필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가보니 독일제 8B 연필이 있는 거야. 깜짝 놀라서 식비, 숙박비, 교통비만 빼고 남은 경비를 탈탈 털어 8B 연필을 잔뜩 사왔지. 여태 그 8B 연필을 써요. 8B 연필이 진하니까 흥분을 해가지고 막 그었는데 엄청 기분이 좋은 거예요. 그랬더니 동경화랑 대표와 이우환 작가가 작품은 좋은데 너무 검다고 하더군요. 속상한 마음에 나는 이 그림은 다시는 햇볕을 보지 못한다 그러면서 비닐에 돌돌 감춰 뒀는데, 한참 뒤에 구겐하임 수석 큐레이터 알렉산드라 먼로 Alexandra Munroe가 와서 그게 제일 좋다고 하더라고. 그렇게 그 그림이 다시 빛을 보게 되었죠. 

선생님의 묘법에는 우리의 흰색과 검은색이 있어요. 
이를 두고 ‘우리는 흰색이 아니라 희끄무레한 것, 검은색이 아니라 거무스름한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셨죠. 
우리 어머니들이 일평생 우리 밥 지어 먹이고 겨울에 따듯하게 하려고 아궁이에 불을 떼잖아요. 그러다 보면 연기 때문에 그을림이 천장, 지붕, 문 밖 추녀까지 시꺼먼 게 아니라 거무스름해져요. 눈 감고 그 거무스름해진 그을림 안으로 손을 넣으면 무한대로 들어갈 것 같은 정신적인 깊이가 있죠. 연기가 쌓여서 된 것 같은 그림을 그려 보자. 내 그림을 보고 일본의 나카라 유스케 평론가가 ‘박서보의 검은색 그림은 정신의 깊이를 아름답게 담는다’고 평했어요. 

20세기와 21세기를 통과해 온전히 작가로만 활동하면서 “변화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그러나 변화하면 또한 추락한다.”고 말하셨어요. 
묘법은 흑백에서 컬러로 변하기도 했는데요, 결국 예술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2000년대 들어 고민이 생겼어요. 아날로그 시대로 70여 년을 성공적으로 살아온 사람인데, 내가 앞으로 살아야 할 21세기는 디지털 시대인데 거기에서 내가 성공할 자신이 없었어요. 지난 70년의 성공을 유지하기 위해 이 선에서 차라리 자결하는 게 낫지 않느냐 별 생각을 다 했지. 그러다 그냥 끝까지 가보자… 이렇게 마음을 먹었어요. 서양은 인간 중심의 문화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그림 속에 토해내요. 그 이미지를 사람들이 돈 주고 사서 걸어 놓고, 그 이미지가 화면 밖으로 뛰쳐나와서 보는 사람을 공격해요. 나는 예술이란 수신을 위한 수행의 도구라고 생각해요. 이를 깨닫고 지금까지 왔는데, 이런 나의 변화 때문에 사람들이 내 그림을 보면서 위안을 받는 거죠. 땡볕 아래 큰 아름드리 나무가 있어서 지나가다 땀 흘리던 사람이 앉아 쉬어갈 수 있듯이 21세기는 그런 예술이 필요한 거예요. 사람을 억압하고 공격하는 예술이 아니라 그림을 보는 사람의 고통과 고뇌를 흡인지처럼 빨아 당겨줘서 이 사람이 행복해지고 편안해져야 한다는 것이 미래 미술의 역할이라는 거죠. 요즘 가만 보면 변화를 못 따라간, 추락하는 사람들이 병이 나는 거예요. 스트레스 받다가 대낮에 미국에서 총기 사고가, 일본에서 칼부림이 나고 그러는 거죠. 나는 자연이 내 선생이라고 생각해요. 꽃 필 때 보면 저런 꽃 덩어리가 나왔다가, 그 다음에 꽃잎 질 무렵엔 이파리가 붙어서 녹색이 신선하고 아주 상쾌해. 그런 걸 나는 다니면서 다 본다고. 머릿속에 가슴 속에 다 저장을 해서 자연의 색을 그림 속으로 유인해 보는 사람을 치유하는 거죠. 내 그림을 산 사람이 창문을 열어 놨더니 새가 들어와서 내 그림을 쪼았대요. 먹으려고 그런 거지. 그걸 수리해 달라고 하길래 고쳐줄 테니 그림 보내라고 했지. 재미있지 않아요?  

2018년 연희동에 집이자 작업실인 기지라는 공간을 열었어요. 지금 인터뷰를 하고 있는 이 공간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매년 독일에서 미술관 멤버들이 25명씩 오는데, 성산동 시절에는 비닐에 둘둘 싸인 그림을 하나씩 벗겨서 보여줬어요. 그게 좀 미안하더라고요. 그래서 기지에서는 내 작품을 걸어놓고 모든 사람이 와서 볼 수 있게 한 거예요. 나 죽으면 내 기념관으로 사용하면 되고. 기지를 설계한 조병수 건축가가 처음에는 너무 나에게 맞춘 공간을 만들려고 했어요. 내 그림으로 무엇을 할 건지 생각하지 말고, 나는 건축가인 당신의 생각 속에 들어가 살고 싶다고 마음대로 하라고 했어요. 완전히 맡긴 거죠. 여기 유리창이 스위스제예요. 리모컨 하나로 이게 다 열려요. 이렇게 크고 넓은 유리창을 아주 얇은 창호에 담았어요. 사실 그러면 너무 비싸. 근데 건축가 이야기 듣다 보니 나중에 후회하는 것보다 은행에서 빚을 지는 한이 있더라도 하자는 대로 하는 게 나을 것 같았어요. 정원에는 내가 좋아하는 매화를 심었어. 붉은색, 흰색, 분홍색… 색이 다 달라요. 

인생에서 선생님의 화양연화는 언제였나요?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말씀해 주세요.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을 때는 두 번 있었어요. 첫번째는 우리 집사람 윤명숙 여사한테 프로포즈 했을 때, (이 대답은 너무 전략적인 것 아니세요? 일동 웃음) 그리고 두 번째는 요즘이야. 내가 1974년에 파리 갔을 때 그때 거기 있던 친구가 한국에서 배추랑 무 씨를 프랑스 별장에 심어 수확한 다음 김치를 담그는 거야. 새콤하니 맛있는데, 한국 배추랑 맛이 달라요. 물이 많고 고소하지 않아. 그게 바로 풍토때문이더라고. 그 나라의 땅과 기후 속에서 살면 그냥 자연스레 일반화되는 거. 예술가로 척박한 이 나라에 뿌리를 내려 이 나라의 자양분으로 컸다는 것이 뿌듯해. 1970년대에 동경화랑 대표가 진작에 내게 뉴욕으로 가라고 권했지만, 처자식이 있는 한국을 떠나 혼자 갈 수는 없었어요. 내 가족은 누가 먹여 살려? 내 성공을 위해 가족을 희생시킬 수는 없지. 두 가지 이유로 거절한 것이 오늘의 박서보를 있게 한 거죠. 지금 박서보는 그 여느 때보다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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