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안상수 

실천가, 디자이너, 교육자


Domus Korea 

N00 2018 Winter


인터뷰  

임나리 





Photo Jang Mi

안상수
1952년 충주 출생. 1970년 홍익대학교 응용미술과에 입학하며 디자이너의 길을 걸었다. 잡지 아트디렉터, 글꼴 디자이너, 국내 그래픽 회사이자 출판사인 안그라픽스 설립, 홍대 시각디자인과 교수,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날개 등 디자이너로 사명감과 역사의식을 갖고 시대에 맞는 모습을 늘 모색하고 행동으로 옮겨왔다. 글자 문화에 공헌한 점을 인정받아 2007년 독일 라이프치히시가 주관하는 쿠텐베르크상을 수상했다.




2014년 애플은 매킨토시 탄생 30주년을 기념해 공식 홈페이지에 30주년 기념 타임라인을 공개했다. 타임라인 속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띈다. 1988년 안상수다. 훈민정음 창제 원리에 근거해 설계한 탈네모꼴 글자체인 안상수체는 한글을 모던하게 탈바꿈시킨 이정표 같은 작업이다. 한글은 전통적으로 11,172자를 한 세트로 서체를 개발하며 글자 하나하나를 매만지는데, 안상수체는 폰토그라퍼 소프트웨어로 67개의 조합으로 이뤄진 조합형 서체를 만들어 한글 디자인에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했다. 새로운 방식, 새로운 형식, 새로운 미학을 위해 언제나 묵묵히 나아갔던 그의 실천은 실험주의 잡지 <보고서/보고서>의 파격에서 잘 드러난다. 한국 전통을 재해석하면서 동시에 한국 시각 문화의 관성에서 벗어난 미감을 꾸준히 탐구했던 안상수. 그는 정년을 5년 앞두고 홍대시각디자인과 교수직을 내려놓았다. 대신 작은 학교를 시작했다.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Paju Typography Institute, 이하 파티)다. 그는 이곳에서 학생들과 대화하고 함께 식사하고 여행한다.
사람들은 그를 교수 대신 ‘날개’라 부른다. 답습하지 않고 안주하지 않는 그는 여전히 행동한다.



공식적으로 스마트폰이 없어 선생님과 연락하기 위해서는 페이스북 메시지가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했어요.
스마트폰이 있지만 전화를 안 받아요. 핸드폰이 처음 나왔을 때 갖고 있었는데, 귀에 대고 사용할 때마다 어지러울 정도로 전자파가 느껴져 쓰지 않았어요. 더구나 전화를 하고나면 그 전에 하고 있던 일을 자꾸 잊어버려요. 전화를 받기 전에 하던 일이 기억이 나지 않고 연결되지 못해서 많이 당황해 했어요. 지금이야 손전화로 길도 찾고 대중교통도 이용하는, 손 안의 컴퓨터 역할을 하니 스마트폰을 씁니다. SNS 메시지는 하지만 전화는 정말 급할 때만 해요. 그래서 가끔 저를 오해하는 사람이 있어요. 다른 이들에게 미안하지요.


파티에서는 선생님을 ‘날개’, 이곳을 ‘날개집’이라 부르더라고요.
보통 학창 시절에 난해하고 어려운 시인이자 소설가 이상을 좋아한다는 사실 자체에 우쭐하는데, 제가 그랬어요. 이상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쓰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실제적인 행위로 나타났죠. 이상이란 존재를 확실히 좋아한다는 일종의 커밍아웃이죠. 그는 한국 현대 타이포그래피의 개척자였어요. 나의 호로 ‘날개’를 사용하면서 내가 있는 집이 자연스레 날개집이 되었고요. 홍대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건축가 이일훈이 설계한 한강변 건물에 작업실을 두었는데, 1990년대 중반부터 ‘날개집’이라 이름 붙인 게 지금까지 오고 있어요. 그래서 그것을 이어서 파티에서는 교장을 ‘날개’, 곧 배우미와 스승들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역할이라고 하여 그렇게 부르고 부교장을 ‘버금’이라 불러요.


파주 타이포그라피 학교(PaTI) 전경.

3년 전 완공된 이 건물은 건축가 김인철이 설계한 것으로

그간 학생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공간들을 직접 변화시켜왔다.


선생님은 디자인을 ‘멋지음’이라고 정의 내렸어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요?
사람으로서 생존에 필수적인 행위 가운데 가장 중요한 동사가 바로 ‘짓다’예요. 그것이 바로 의식주인데 그것을 옷 짓고, 밥 짓고, 집 짓는다고 표현해요. ‘어머니가 밥을 지으셨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만든다’가 아닌 ‘짓다’는 동사에는 정성이 느껴집니다. ‘글 짓다’, ‘표정 짓다’, ‘웃음 짓고 눈물 짓다’처럼 ‘짓다’는 창의적이고 감성적인 부분도 포함하고 있고요. 심지어 ‘죄를 짓다’라는 말도 있잖아요. ‘짓다’라는 동사는 인위적인 의지, 주체적인 정성과 생각, 창의까지도 아우르고 있는 거죠. 더 나아가 ‘좋은 업을 짓다’는 말도 있어요. 한 사람이 잘 살면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난다는 뜻으로 시공을 초월하는 큰 ‘짓’이에요. 우리말로 디자인을 어떻게 부를까 화두로 물고 지내던 중 어느 날 내게 불쑥 들어온 낱말이 바로 ‘멋’이었어요. ‘디자인’(design)이란 말을 받아들이고 쓸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변방이 되고, 밀라노, 뉴욕, 빠리가 디자인 중심이라는 자격지심이 저도 모르게 생기더라구요. 디자인이란 낱말 뿌리를 자꾸 따지게 되기도 하구요. 한마디로 말해 디자인이란 멋을 짓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우리 어머니말인 ‘멋’이라는 말을 쓰는 순간 우리는 몇 만년 동안 이어 내려온 이 땅의 우리 어머니들의 삶의 미감이 떠올려집니다. 그러나 ‘디자인’이란 말의 안경을 쓰고 ‘할머니’를 보면 갑자기 할머니가 촌스럽게 보이게 되지요. 말 한마디가 우리 삶의 미감을 낮추어 보게 만듭니다. 제게 ‘멋’이란 말의 재발견은 제 자신에 대해 자각한 순간이자 저를 ‘디자인’의 자격지심에서 해방시키는 계기가 되었어요. 그 뒤로 디자인을 ‘멋지음’, 디자인하는 행위를 ‘멋짓’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2012년 8월 열린 홍대 시각디자인과 교수 퇴임식을 진짜 파티처럼 신명 나게 진행했다고 들었어요. 춤추고 노래하는 퇴임식이 무엇보다 선생님다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정년 5년 앞두고 중도 하차하는 것이라 티 나지 않게 하고 싶었어요. 강사로 학생들 앞에 처음 선 때가 1982년이고, 전임이 1991년에 되었으니 서른 해 동안 홍대에서 가르쳤지요. 디자인계에서 홍대 교수라는 건 특별한 지위였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정년이 보장된 기차에서 내려 작은 차로 갈아타겠다는 각오를 한 상태였습니다. 사실 정년을 마치는 것이 아니라서 퇴임식이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았어요. 제 성향을 잘 아는 제자들이 ‘날개 훨훨 기림잔치’라는 이름의 소박한 전시로 꾸며주었지요. ‘날개’인 제가 훨훨 날아갈 수 있도록 축하해주는 잔치라는 뜻이 담긴 것이라 봐요. 전시는 2~3일 정도 짧게 했고, 전시 내용은 제 작업이 아닌 재직 기간 동안 제 수업 결과물을 한자리에 모아 놓은 자리였습니다. 그날 저녁 비가 내렸는데 많은 이들이 와주었어요. 짤막한 인사를 나누고, 저와 가까이 지내는 밴드 윈디시티 김반장이 비내리는 교문 앞에서 공연을 했어요. 빗속에서 함께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죠.


자의든 타의든 30년간 홍대의 상징이었는데, 제도권 디자인 교육의 너머를 바라보게 된 계기가 있나요?
계기는 많을 거예요. 우리는 모두 삶을 한 번만 살잖아요. 두 번 살 수 있는 게 아니지요. 60년을 살아오면서 이제 남은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디자인 현장에서 20년, 학교에서 20년을 보내고 난 제가 제 삶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많은 생각을 했어요. 정년을 채우는 게 좋지 않겠냐는 주변 권고가 있었지만 정년 이후에 제가 그리는 새로운 학교를 시작하기에는 저의 몸 나이를 고려해야 했어요. 내 건전지에 조금이라도 힘이 더 남아 있을 때, 새 디자인 학교에 힘을 쏟아부을 수 있도록 결행한 거죠. 사실 겁도 많이 났어요.


2013년 설립한 파티는 교육 협동조합입니다. 기존 디자인 대학과 어떤 점이 다른가요?
본디 대학(university) 말 자체가 스승과 배우미의 공동체란 말에서 비롯되었어요. 협동조합이란 바탕생각이 바로 그 뜻 그대로이지요. 그러니까 ‘배우미와 스승이 디자인해나가는 학교’라는 것이고 그 알맹이는 민주주의학교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어요. 학위는 없습니다. 4년제 학부 과정인 파티 한배곳, 2년제 심화 과정인 파티 더배곳이 있어요. 배곳이라는 말은 1914년 주시경 선생님이 조선어강습원의 이름을 ‘한글배곳’으로 바꾼 말을 이어 쓴 것입니다. 학교의 우리말이지요. 파티는 3무를 지향하는데, 무소유, 무경쟁, 무권위가 그것입니다. 손과 몸을 중시하는 실기 학교로 모든 배움 과정은 책으로 종합하고요. 책이야말로 생각과 실천이 담긴 종합 매체이니까요.

안상수체 모듈

© Ahn Sangsoo



파티가 파주출판도시에 자리 잡게 된 이유가 있나요?
이곳은 건축가들이 마음 먹고 설계해 디자인적으로 훌륭한 환경을 만든 도시입니다. 파주출판도시 설립 당시 기획위원 중 한 사람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이 도시의 속성, 변화 과정 등을 잘 알고 있었어요. 교육은 곧 교육적인 환경을 만드는 일이에요. 파주출판도시는 이미 멋진 교육 환경이자 캠퍼스라 봤어요. 건축적 환경이 매우 훌륭합니다. 그리고 출판도시에서 일하는 사람들, 곧 기획자, 편집자, 디자이너, 영화 관련인, 창작가, 작가, 예술가까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어요. 더구나 출판사, 인쇄소, 도서관, 활판공방, 영화관, 미술관 등 한국 문화 콘텐츠의 생산지로 훌륭한 기반 시설이 조성되어 있는, 네트워크가 빼어난 교육 캠퍼스로 이미 완벽해요. 새로운 자본을 투입해 공간을 만들 필요 없이 이미 있는 공간을 활용하고 연결하면 되었습니다. 현재 출판산업은 하향세예요. 한 산업을 중심으로 도시가 계속 생존할 수는 없어요. 이곳에서 창의적인 젊은이들이 모여들고 활동하고 그들 사이에 예술적 화학반응이 일어나고 있지요. 파주출판도시가 더 확실하게 교육도시로 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파티라는 디자인 학교뿐만 아니라 영화 학교, 건축 학교, 사진 학교 등 다양한 교육 활동이 일어나길 기대합니다.


30년 넘게 거주 중인 평창동 단층 주택 입구에 설치한 한글문

© Ahn Sangsoo

대안교육의 시작은 교육 방식뿐만 아니라 교육 공간에서도 드러납니다. 파티는 얼핏 보기에도 기존 학교와 많이 달라 보여요.
다시 말하지만 교육이란 그 환경으로 교육적 목적을 이루는 것 그 자체의 힘이 매우 크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자기가 그 공간에 지내면서도 그 공간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못하지요. 특히 우리나라가 그래요. 마치 아파트를 내 삶의 공간이 아니라 투자로서의 부동산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요. 새 집에 사는 사람이 벽에 못 하나 박지 못하는 거죠. 파티 배우미(학생)들이 학교 공간 자체를 자신이 주인이라고 여길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지요. 그들이 직접 공간을 움직이고 변화시키지요. 자신이 지내는 환경을 바꿀 수 있도록 하는 거예요. 건축가 김인철이 설계한 파티 건물은 지난 3년 동안 완전히 바뀌었어요. 앞으로도 계속 바뀔 겁니다. 애초에 설계 개념이 그랬어요. 이는 설계 전 배우미들과 건축가가 함께 워크숍을 5번 진행하며 합의된 개념이었어요.

파티 첫 수업이 배우미가 사용할 책상과 의자를 직접 만드는 ‘내 공간 멋짓기’라고 들었어요.
학교에서 지낼 자신의 공간을 자기가 멋짓고 만드는 과정이에요. 처음에 자리 배치를 논의하고, 재개발지역에 가서 버려진 개성에 맞는 집기들을 구해오고 그것들의 디자인을 개선하거나 스스로 디자인해서 만들거나 해서 배치한 다음 다시 논의해요. 창가에 앉고 싶은 사람과 벽면을 마주하고 싶은 이 등 서로 의견을 나누고, 이견을 조정해가죠. 조명등을 직접 만들기도 하고 집에 있는 걸 가져오기도 하고, 그런 결정 과정 자체가 디자인이에요. 또 1970-80년대 쓰던 가구들이 이런 과정을 거치니 학교 풍경도 달라졌어요. 어떤 방법으로든 이 수업을 이어가고 싶은데, 사실 지금은 책상과 의자를 만들어도 놓을 자리가 없어져 가요. 새로운 가구를 만들기 위해 이전 가구를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라 조심스러워요. ‘내 공간 멋짓기’를 어떻게 발전시켜서 이어갈지 현재 논의 중입니다.


PaTI 내부 전경


파티의 구호인 ‘홀려라’와 ‘놀뿐’이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가요?
‘홀려라’는 완전한 자기 몰입이에요. 물속에 발을 살짝 담가 보는 게 아닌 아예 수영장에 풍덩 빠져야 되는 거죠. 연애와 비슷해요. 연애할 때는 아무리 바쁘고 부모가 반대해도 기어코 시간을 내어 만나잖아요. 그게 본능이에요. 파티는 앞으로 이 길로 들어서겠다는 마음을 먹고 온 것인데, 홀리지 못하면 안 되잖아요. 몰입 상태로 있어도 사실 될까 말까 해요. 노력이 따라야지요. 창의적인 분야에서 성실과 노력에 대한 표현을 ‘홀려라’라고 한 것이지요. ‘귀신에 홀린다’라는 말은 더 정신적이고 영적인, 논리를 넘어선 감각에 대한 홀림을 뜻하는 거예요. 차원을 넘어선다는 이야기죠. ‘놀뿐’은 놀이를 할 때 창의성이 극대화되기에 나온 말이고요. 파티의 구호들입니다.


파티 설립 이후 선생님은 매일 작업복을 입어요.
작업복은 파티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의도적인 거죠.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 사람의 행동이 달라져요. 파티를 시작한 뒤로 다른 옷으로 갈아 입은 적이 거의 없어요. 작업복은 입학할 때 파티 배우미에게 전부 나눠줍니다. 저 역시 그들과 같음을 실천하는 거죠. 저를 벼리는 거예요. 저는 현재 파티에 온 힘을 쏟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이 작업복을 입고 있는 저 자신도 작업자라는 신호이기도 하구요.


계속 붓으로 노트에 필기를 하던데, 간편한 펜이 아닌 붓인 이유가 있나요?
자꾸 의도적으로 쓰는 거죠. 보통 때도 붓으로 써요. 특히 먹을 갈아 붓을 쓸 때는 느낌이 달라요. 붓으로 쓰면 허투루 못 쓰잖아요. 이를 일상화할 때 저에게는 의미가 달라지는 것 같아요. 붓을 잡고 있는 동안은 꼭 필요한 집중을 하게되고 저를 벼리고 날을 세우는 느낌을 받아요. 연필로 글씨를 써온 이들과 붓을 써온 이들의 글씨는 달라요. 지금의 젊은이들은 지금 60-70대들과는 달리 또박또박 귀여운 글씨를 쓰잖아요. 볼펜이나 연필로 쓰면 선이 되고, 붓으로 쓰면 획이 됩니다. 선은 단일한 변화에 그치지만 획에는 강약이 있고, 속도감이 있고, 깊이와 두께가 있죠. 이게 동서양의 가장 큰 차이예요. 여기에서부터 미감이 달라지는 거죠.

오랫동안 한글 디자인을 연구한 사람으로서 한글에는 우리의 어떤 미의식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하나요?
언어와 글자는 그 민족 자체예요. 중국, 일본, 한국 세 나라 사람이 말하지 않고 가만있으면 실제 구분하기 어려워요. 얼굴이나 눈빛만으로는 국적을 알 수 없는 거죠. 훔볼트는 민족 언어론에서 말을 하는 순간 그 민족의 특성이 나타난다고 했어요. 우리 문화, 우리 겨레의 핵심은 언어라고 봐요. 그것의 가시적인 형태가 문자고요. 언어와 문자는 우리 일상이자 문화적인 환경이에요.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표현하는 거죠. 우리말의 DNA는 글자와 국가가 생기기 전 그러니까 몇 만 년 전부터 우리의 모어 속에서 흘러내려온 거예요. 모국어가 아닌 모어, 즉 어머니의 말이에요.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 그 줄기에서 내려오는 말이에요. 그 모어를 그대로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글자가 한글이에요. 한자에는 ‘뿐’이라는 글자가 없어요. ‘얄리얄리얄랴셩’에서 ‘얄’이나 ‘셩’은 한글에만 존재하지 다른 나라 문자에는 없어요. 세종이라는 위대한 디자이너가 600년 전에 디자인한 거죠. 한글은 우리 겨레의 문화적 그릇이 된 거예요. 한글은 단순하고 쉽고 간이한 과정 속에 있어요. 그런 과정에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죠. 이런 특징은 굉장히 현대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2017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된 <홀려라>는 

‘놀뿐’과 함께 PaTI의 지향점을 나타내는 구호이다.

© Ahn Sangsoo

1988년 창간한 <보고서 보고서> 1호에는 ‘새로움에 대한 욕구를 존중합니다’라는 말이 있어요. 지금 선생님에게 새로움을 느끼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새로움에 대한 욕구가 사라지면 삶의 재미가 끝나는 것 같아요. 욕구를 주는 거야 많죠. 예전에 가까이 지냈던 우리나라 컴퓨터 1세대들을 최근 다시 만나면서 가장 호기심이 생긴 분야는 코딩입니다. 제게 큰 자극을 줘요. 제가 프로그래머나 코더가 되겠다는 게 아니라 그들과 어떻게 대화하고 협업해야 하는지를 경험하고 있어요. 


컴퓨터에 대한 선생님의 관심은 선구적이었던 것 같아요. 1985년 발표한 안상수체가 도면을 그리는 프로그램인 오토캐드 2.1로 시작했다는 점도 신선했어요.
네. 80년대 초 8비트 컴퓨터부터 시작했습니다. 16비트 컴퓨터가 나와서 샀는데, 그때 컴퓨터 파는 분이 플로피 디스크 2장짜리 프로그램을 선물로 끼워 줬어요. 오토캐드였죠. 그것이 유일하게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도구였어요. 안상수체는 수치를 계산해야 편한 글꼴이지요. 오토캐드를 사용한 게 내게는 행운 같은 출발이었죠. 컴퓨터는 제 디자인 삶에서 아주 중요한 도구예요. 컴퓨터는 제가 잘 하지 못하는 것을 대신 해줄 수 있기에 남들보다 더 관심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한쪽 눈을 제외한 얼굴의 나머지를 손으로 가린 안상수 자신의 사진을 사용한 <보고서/보고서> 창간호 표지


일렉트로닉 카페의 통신 시스템 스케치와 당시 공간의 모습


1987년 홍대 앞에 최초의 사이버카페, 인터넷 카페로 기록되고 있는 일렉트로닉 카페를 잠깐 운영했어요. 홍대 문화가 ‘안상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이름 그대로 인터넷이 되는 전자 카페였어요. 이 카페부터 홍대의 클럽 문화가 시작됐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죠. 1980년대만 해도 우리가 볼 수 없는 영화나 영상이 많았는데, 핑크 플로이드의 공연 실황이나 러시아의 아방가르드 영화 등을 같이 봤죠. 일렉트로닉 카페는 열자마자 홍대앞 젊은 예술가, 엠팔(Empal) 같은 컴퓨터 관련 분야 사람들이 모이는 아지트가 되었어요. 1990년 9월 17일에는 LA와 서울을 연결하는 통신 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고요. 말, 텍스트, 화상을 각각의 통신수단으로 교신하면서, 스피커폰을 사용해 모인 사람들이 소리를 같이 들었죠. 홍대 안만큼 그 ‘홍대 앞’을 좋아해서 밤늦게까지 즐거이 지내는 시간이 많았는데, 이 동네 친구들이 저에게 ‘홍대앞 총장’, ‘상수동 촌장’이라는 별명을 지어주기도 했지요.


1977년에 지은 28평짜리 평창동 단층 주택에서 30년 넘게 살고 있어요.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궁금해요.
네 오래전부터 살아서 주변에서 평창동 원주민이라 그래요. 태어나서 아파트를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베이징에 교환교수로 갔을 때 학교에서 제공해 준 원룸 아파트에서 딱 일 년 살아본 경험이 전부지요. 흙을 밟을 수 있는 마당 있는 집이 좋아요. 강아지가 뛰놀고, 꽃 피고, 낙엽 떨어지고, 빗소리가 들리고, 그런 삶이 주는 즐거움과 기쁨이 있어요.










항상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데, 무엇을 찍나요?
후지필름 X-T2를 쓰다가 최근에 X-T3로 바꿨습니다. 제가 만나는 사람을 찍어요. 일종의 일기 같은 거죠. 만난 사람에 대한 기록. 그들의 ‘원 아이’를 찍어요. 


한쪽 눈을 가린 얼굴 사진인 원 아이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보고서 보고서> 1호 표지가 ‘한눈빛박이’의 시초예요. 한쪽 눈을 손으로 가린 내가 표지에 등장했는데, 자발적인 포즈였어요. 빛박이는 최영돈이 하구요. 오래 잊고 지내다 몇 년 뒤 원 아이 포즈로 띄엄띄엄 찍고 하다가 어느 순간 빈도가 늘어나면서 매일 찍게 됐어요.


강현주 교수님은 ‘한국 그래픽 디자인 문화에서 범 안상수는 분명 다수 혹은 주류다. 하지만 1952년생으로 한국 그래픽 디자인을 대표하는 스타 디자이너임에도 자발적 비주류의 행동 양식을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소수다’라고 말했는데, 선생님의 여러 행보를 보면 굉장히 와닿는 말이었어요.
저에 대한 말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언제나 소수가 되고 싶습니다. 소수가 제 성향에 맞아요. 무리 지어 가지 않고 비껴 간다는 것이 저 자신을 긴장시키니까요.



디자이너로 20년, 교육자로 30여 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삶을 운영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나요?
늘 밧줄 위의 곡예사처럼 긴장하며 살아온 듯합니다. ‘시중(時中)’이라는 말을 곁에 두고 있지요.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그렇게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외부에 면한 복도. PaTI는 조금씩 단을 높여 건물 전체를 감싸 올라가는 독특한 동선 구조를 갖고 있다.


서울시 서대문구 모래내로17길 59-6 | 사업자등록번호 : 396-09-01733

대표자 : 임나리 | 01@wordandview.com

Copyright ⓒ 2025 워드앤뷰 All rights reserved.